1992년에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인 '붉은 돼지(Porco Rosso, 紅の豚)'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중에서도 지극히 미야자키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강한 영화입니다. 어릴 적부터 비행기나 하늘을 나는 것을 동경하던 미야자키 감독이 이 영화 제작에 관하여 밝힌 바에 따르면 '지쳐서 뇌세포가 두부가 된 중년 남자를 위한 만화영화로 만들고 싶다'라는 다소 유머 있는 표현을 내놓았는데, 이 영화는 어쩌면 감독 스스로에게 헌정하는 작품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이들이 보면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필자 역시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접했지만, 당연히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이나 의미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이나 색채, 개성 강한 주인공, 그리고 유독 빨간 비행기만 기억에 남았을 뿐입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권의 코드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서구권의 배경과 문화를 온전히 녹여내어서 그런지 지브리 작품 중에서도 유독 서양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붉은 돼지'에 담긴 비행정 시대의 배경이나 파일럿의 삶, 영화가 말하는 삶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스포일러 경고: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감상 후 읽어주세요!
1. 비행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Porco Rosso(紅の豚, 붉은 돼지)'
먼저 이 작품의 시공간적인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전간기 파시스트 치하의 이탈리아로 설정하며, 그 시대의 분위기를 꽤 정교하게 재현하는 데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는 1922년에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독재하에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포르코 로소는 전직 공군이었지만, 파시즘에 미쳐버린 조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 뒤, 자신의 비행기를 통해 은거하며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의 파시스트 일당들이 그를 항상 감시하거나 미행합니다. 하지만 파시스트에 매몰되어 환멸이 된 그의 심정이나 조국의 현실과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영화의 배경인 이탈리아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1)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포르코 로소는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서 홀로 은거하듯이 느긋하게 생활하며, 공적들을 사냥할 때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진 절벽 위에서 비행을 준비합니다. 영화의 작화 배경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아드리아해 연안과 달마티아 해안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같은 도시에서도 영화 속에 묘사된 것과 비교적 비슷한 풍경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2) 이탈리아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축물
영화에는 이탈리아 고풍스러운 특유의 붉은 벽돌 지붕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꽤 등장합니다. 특히 포르코가 밤이면 종종 찾아오는 마담 지나의 술집에는 아르데코 스타일의 가구들과 장식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오래된 비행기 격납고 역시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유럽풍 디자인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3) 1920년대 유럽의 분위기 재현
역사적으로 영화의 배경 연도인 1929년의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간기로써 파시즘의 집권과 세계 대공황 등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시기의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으며, 포르코와 그 주변 인물들이 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묘사합니다. 포르코는 주변의 지인들이 다시 공군에 돌아오라든지, 혹은 애국 채권을 구입하여 국가에 공헌하는 게 어떻겠냐는 현실적인 조언에 거절합니다.
2. 파일럿의 삶
주인공인 포르코 로소는 단순한 공적을 사냥하는 현상금 비행사가 아니라, 전쟁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파일럿이자 전직 공군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이후 파일럿들이 대략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묘사됩니다.
1) 파일럿들의 전쟁 후 모습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을 비롯한 파일럿들은 국가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일부는 전투 조종사로 남거나 용병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주인공 포르코 로소 역시 만화적인 설정이 다소 가미되었기는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정부군을 떠나 해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용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2) 구름의 평원에서 묘사된 파일럿들의 최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다면, 포르코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공군으로써 치열하게 싸우던 중 그의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곳에서 자신의 전투기를 타고 조용한 구름의 평원 위로 떠오릅니다. 멀리 머리 위로는 이상한 비행기 구름 같은 것이 펼쳐 보입니다. 알고 보니 그 구름은 죽어 나간 수많은 전투기 조종사의 잔해였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자신과 함께 불과 바로 전에까지 싸우던 많은 동료와 적군들이 하나둘씩 그 잔해 속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포르코는 다시 내려오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다 위를 혼자서 날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전장에 나가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파일럿의 평화로운 최후를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을 정말 심오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3) 공중 해적과의 애증의 관계
영화 속에서 포르코는 공중 해적단과 제대로 맞서 싸우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선의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영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해적들과도 일종의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 후 지쳤거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포르코와 해적들은 서로 적이면서도 때로는 조금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4) 인간성과 자유에 대한 갈등
포르코 로소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전쟁과 파시즘으로 미쳐있는 국가에 대한 환멸로 인해 인간성을 잃고 원인 모를 마법에 걸려 돼지의 모습이 되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이 한 인간에게 남긴 트라우마와 상처를 상징하는 부분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과 인간을 분리합니다. 국가와는 더욱 철저하게 분리합니다. 대신 그는 하늘을 나는 동안만큼은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파일럿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영화 'Porco Rosso(紅の豚, 붉은 돼지)'가 전하는 삶의 의미
지브리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나름의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
주인공인 포르코 로소가 돼지로 변한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는 전쟁의 상처와 인간성이 퇴화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인간다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만의 신념이나 방식을 끝까지 지키려 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커티스와의 결투에서라든지 다른 공적과의 중요한 결투에서는 함부로 총탄을 쏘지 않고 적이 먼저 총탄을 다 쏘게끔 만든 뒤, 마지막에 한두 발 경고 사격을 날리는 정도로 승리를 쟁취하며 살인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이 돼지와 같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가치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감독의 철학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도 읽힙니다.
2) 현실 도피와 자기 극복
포르코는 전쟁을 겪은 후 파시즘으로 변화된 자기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피오와 지나를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인간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이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다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삶의 품격과 유머
영화는 시대상으로나 인간성 등을 보면 나름 심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행정을 새롭게 디자인한 소녀 피오와의 만남이나 여정, 피오를 두고 포르코와 커티스의 결투 장면, 공중 해적들의 코믹한 모습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밝게 만들며, 결국 삶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감독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철저하게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위한 작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결론
영화 '붉은 돼지'는 자유와 반전(反戰),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주제를 무겁지 않고 유머 있게 담은 작품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미야자키 감독 본인의 말대로 '뇌세포가 두부가 되어버린 중년 남성'이 보기에 딱 적합한 수준의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의 만화 영화처럼 유치하거나 가볍지 않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괜히 무겁게 폼이나 잡는 심오한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유머 있게 표현한 것이 너무나도 조화롭습니다.